세계 유일, 평신도에 의해 자발적으로 세워진 한국 가톨릭교회
한국 가톨릭교회는 진리에 갈망하던 평신도들, 그 중에서도 학자들을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습니다. 외국인 성직자의 선교 활동이 없이 자발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세계 교회사상 유례없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1582년,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 신부가 중국에서 저술한 교리서 『천주실의』(天主實義, ‘하느님에 대한 참된 가르침’이라는 뜻)가 특히 한국 천주교 성립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초기에는 사제도 없었기에, 평신도 스스로 성경을 공부하고 복음을 실천하며 신앙 공동체를 이끌었습니다. 그들은 연구를 통해 받아들인 신앙을 박해 중에도 끝까지 지켜내며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유교 이념이 지배적이었고, 신분 질서와 조상에 대한 제례가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런 가운데 신앙이 가르치는 ‘인간 평등 사상’과 조상 제사 금지 등은 기존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었고, 이는 크고 작은 박해를 불러왔습니다. 특히 100여 년 동안 네 번의 큰 박해가 있었는데, 특히 병인박해(1866년) 때는 무려 8천여명의 신자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1891년 종현성당 (현 명동대성당)
순교자 시상식 ( 1984년 여의도 광장 )

1831년 교황청은 조선대목구를 설정하며 한국 교회의 교계 제도 기반을 마련하였고, 1845년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1984년, 한국 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한이 방한하였고, 그 자리에서 103위 한국 순교자가 시성되었습니다.
이는 바티칸 바깥에서 처음으로 이뤄진 시성식이었습니다.
2014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한국을 공식방문하여, 124위 한국 순교자의 시복식을 주례하였습니다.

2014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 한국 방문
한국 교회의 신앙 선조들은 모진 박해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간직하고 이어왔습니다. “배교하겠다”는 단 한마디면 무너진 가정을 회복하고, 잃었던 명예와 가산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기꺼이 고난과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이러한 순교의 믿음 위에 세워진 오늘날 한국 가톨릭교회는 아시아 대륙 복음화의 희망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